사람이 소신 있고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과 고집이 있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소신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우왕좌왕하게 되고 한 가지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생각이나 소신을 버리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소신이 없거나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양보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어야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5장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서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예루살렘 공회에까지 가지고 가서 해결을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6장에 와서는 할례가 필요 없다는 자신의 소신을 버리는 행동을 합니다. 즉, 그와 같이 전도여행을 할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행동을 보고 소신 없는 일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소신과 생각이 있었지만 자기의 생각과 소신을 그 상황에서는 주장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소신 있다는 평을 듣는 사람과 ‘완고하다’ 또는 ‘고집불통이다’ 는 소리를 사람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집불통과 완고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뜻을 굽힐 줄 모르고 내세우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 면에 좋은 의미로 소신 있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때와 양보 할 때는 잘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날 디모데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상황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쏟아질 유대인들의 불필요한 문제제기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소신을 주장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별할 줄 알았습니다.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위하여 자기의 생각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변화의 능력이었고 지혜였습니다. 전도자로서의 지혜와 변화의 능력을 회복하는 하루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 사명을 위하여 고집과 변화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