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교수가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뱃사공과 이런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보게, 자네 철학을 아는가?”, “모릅니다.”, “허허, 자네는 생애의 4분의 1을 잃었군. 그럼 지질학을 아는가?”, “전혀 모르는데요.”, “그럼 생애의 절반을 잃었군. 천문학은 아는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자네는 생애의 4분의 3을 잃었군.” 그때 갑자기 배가 기울어져서 둘 다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공이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못 치네.”, “그럼 교수님 은 생애 전부를 잃으셨군요!”
이들의 대화는 무엇이 소중한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대부분이 이런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1절). 본문에서는 점잖게 질문한 것처럼 되어있지만, 누가복음 9장 46절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라고 되어 있는데, 공동번역 성경에 의하면 “제자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났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위대하신 주님 앞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 서로 잘난 척하는 것처럼 흉한 일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런 일로 다투지 말도록 꾸지람을 받았는데도 또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아질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더 나아도 우쭐한 게 우리 마음은 아니던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큰 자가 됨으로써 천국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 겸손한 천국 백성이 됨으로써 큰 자가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처럼 “자기를 낮추는 그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거듭난 겸손 한 어린아이가 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자녀들을 천국의 자녀로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 우리 모두가 천국의 자녀 되게 하소서